무엇보다 다중우주 이론이 아홉 가지씩이나 된다니 놀랍다. 무한우주론, 인플레이션 이론, 양자장 이론, 끈이론, 컴퓨터과학처럼 서로 다른 분야에서 출발해 극한의 사유를 전개하다보면 “우주는 유일하지 않으며 오히려 여러 개 또는 무한 개이다”라는 다중우주론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멀티 유니버스>는 서로 다른 아홉 가지 이론이 왜 생겨날 수밖에 없었는지를 각각의 이론적 배경을 살피며 찬찬히 보여주고 있다.
_올해의 과학책 – 1·2월 서평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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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뭐?’ 도무지 실감할 수 없는 엄청난 시공간 규모에서 다뤄지는 현대 우주론의 매력에 흠뻑 빠졌다가도 다시 일상사가 떠오를 때 즈음에는 바로 ‘그래서, 뭐 어쨌다는 거지’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우주가 137억 년 전 탄생했으며 지금도 계속 가속 팽창을 하고 있고 우주에는 우리가 아는 보통 물질과 다른 정체 모를 암흑에너지가 훨씬 더 많다는 현대 우주론은 바로 코 앞에서 벌어지는 우리 일상의 생활에서 바라볼 때에는 한가한 지식 사치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사실 우주론은 언제나 많은 사람의 관심사이다. 우주론 이야기의 곁에는 늘 많은 청중이 있다. 아마도 너무 익숙한 일상 경험에서는 상상할 수조차 없는 저 깊디깊은 근원 또는 기원을 떠올릴 수 있는 시간이 바로 우주론 이야기를 들을 때이기 때문은 아닐까? 그리하여 작은 지구 행성의 인간사회가 좇는 화려한 가치들이 잠시나마 아주 낮은 곳으로 제 자리를 찾아가기 때문은 아닐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실감할 수 없는 규모의 우주조차 수많은 우주들 중에서, 또는 무한한 갯수의 우주들 중에서 ‘그 중 하나’일 뿐이라는 다중우주 이론을 들으면 우리는 더욱 더 낯선 곳으로 나아간다. 평행우주(parallel universes), 멀티 유니버스(multiple universes), 메가버스(megaverse) 등으로 불리는 다중우주론들은 일상 경험에서 더 멀리 달아난 과학이론을 제시하며, ‘…그러면 대체 어떻게 되는거야?’ 하는 당혹스러움마저 던져준다. 이름난 과학저술가이자 물리학자인 브라이언 그린(미국 컬럼비아대학교 수학·물리학과 교수)의 새 책 <멀티 유니버스>(원제: The Hidden Reality)는 다양한 분야에서 제기되는 그럴듯한 다중우주 이론들을 아홉 가지로 정리해 독자들을 낯선 세계로 안내한다. 무엇보다 다중우주 이론이 적어도 아홉 가지나 된다니 놀랍다. 무한우주론, 인플레이션 이론, 양자장 이론, 끈이론, 컴퓨터과학처럼 서로 다른 분야에서 출발했으되 극한의 추론을 펴다보면 “우주는 유일하지 않으며 오히려 여러 개 또는 무한 개이다”라는 다중우주 세계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책은 아홉 가지 이론이 왜 생겨날 수밖에 없었는지를 각각의 이론적 배경을 살피며 찬찬히 보여준다. 다중우주론도 저마다 달라 어떤 것은 단순하고 어떤 것은 매우 난해해 알아듣기가 쉽지 않다. 그렇더라도 공상과학의 상상이 아니라 진지한 과학적 상상력의 결과로 태어난 다중우주의 과학 이야기를 듣는 일은 흥미진진하다.
■ 저마다 다른 세계, 다른 다중우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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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 교수가 전해주는 다중우주의 아홉 가지 이야기를 잠시 따라가 보자. 먼저 우주가 유일하지 않으며 다른 우주들이 존재한다는 추론은 아주 단순명쾌한 논리에서 나올 수 있다. ‘우주는 무한하다’는 게 사실이라면 가능한 추론이다. 배가 수평선 저 너머로 나아가면 해변에서 더 이상 배를 볼 수 없어도 배는 수평선 너머에 여전히 존재하듯이, 우주가 무한하다면 우리가 관측할 수 있는 한계인 ‘우주지평선’ 너머에도 우주 공간은 계속 이어져 존재할 것이다. 그러니 우주가 무한하다면 우주지평선 너머의 무한 공간에는 우리가 접할 수 없는 또 다른 우주들이 계속 이어서 존재할 테고 무한 공간에서 그런 우주들은 당연히 무한한 갯수로 존재할 테니, 거기에 우리 우주와 똑같은 우주가 존재할 가능성도 충분하다는 논리다. “다시 말해서 우주가 무한히 크다면, 지금의 당신과 같이 행동하면서 당신과 동일한 실체를 느끼는 존재가 우주 어딘가에 또 있다는 뜻이다”(70쪽). 물론 다른 우주들은 우주지평선 너머에 있으니 인식할 수도, 우주들 간에 정보를 주고받을 수도 없어 다른 우주를 확인할 방법은 없다.
이런 “누벼 이은 다중우주” 가설이 책의 맨 앞에서 다뤄진 것은 다행한 일이다. 우주론에 관한 기본 개념부터 접근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이제부터 그린 교수는 점점 복잡하고 기기묘묘해 따라가기도 벅찬 이론과 가설을 줄줄이 등장시킨다. 그 중에서도 가장 기반이 탄탄한 이론은 아무래도 인플레이션 다중우주론일 것이다. 우주대폭발(빅뱅) 이론에서 표준모형으로 인정받는 인플레이션 우주론에서 도출되는 다중우주의 존재 가능성은 팽창하는 우주들은 우리 우주 말고도 더 있다는 가설에서 생겨난다. 인플레이션(공간의 급팽창)은 균일한 장이 만들어내는 강력한 ‘음압(음의 압력)’ 에너지가 어느 순간 급격히 팽창하며 일어나는데, 무한 공간에서는 이런저런 인플레이션들이 서로 다른 조건과 상태로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린 교수는 팽창하는 여러 공간들을 구멍이 숭숭 난 ‘스위스 치즈’ 모형에 비유한다. 크게 팽창하는 우주와 작게 팽창하는 우주들은 아직 팽창 사건이 일어나지 않은 또 다른 공간들이 구멍난 치즈처럼 어울려 있다는 것이다. “우주 치즈는 한 없이 커지고 그 안에 나 있는 구멍의 수도 한없이 늘어나게 된다. 우주론 학자들은 이 구멍을 ‘거품우주(buuble universe)’, 또는 ‘주머니우주(pocket universe)’라고 부른다. 각각의 거품우주는 초고속으로 팽창하는 우주에 나 있는 구멍으로 생각할 수 있다”(108쪽).
사실,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뤄지는 분야는 끈이론이다. 그린 교수 자신이 끈이론 연구자이기도 하거니와 다중우주론이 끈이론 분야에서 여럿 제기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끈이론은 물질과 힘의 근원도 쪼개고 쪼개다보면 결국에는 어떤 ‘입자’가 아니라 1차원의 ‘끈’이며, 이런 끈의 진동 패턴에 따라서 여러 입자 물질과 힘들이 만들어지고 작용한다고 보는 수학적 물리학의 이론이다. 끈의 존재는 현재 과학기술 수준에서는 직접 검증할 수 없으나, 끈이론 체제가 우주의 근원적인 물질과 힘을 잘 설명해주기 때문에 물리학에서는 주요 이론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린 교수는 끈이론 분야에서 제기되는 다중우주 이론으로, 브레인(brane, 막) 다중우주, 주기적 다중우주, 경관(landscape, 풍경) 다중우주 이론으로 요약하며 제4~6장에서 추상적인 끈이론의 주요 개념들을 찬찬히 설명하며 다루고 있다.
■ 끈이론에서 태어난 난해한 다중우주들,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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끈이론의 ‘브레인 다중우주’ 가설에서는 3차원 공간의 세계를 단순하게 표현해 2차원의 막으로 나타내는데, 이런 막들은 공간을 떠다니며 서로 건너갈 수 없는 각자의 세계를 구성한다. 특히 브레인 다중우주론은 4차원 시공간 이상의 여분차원들이 존재함을 보여주는 이론이며 우주 만물의 기본 힘 중 하나인 중력이 다른 힘들(핵력, 약력, 전자기력)에 비해 터무니없을 정도로 작은 이유(예컨대 쇠붙이가 중력에 거슬러 자석(자기력)에 달라붙는 이유)를 설명해주는 이론이라는 점에서 주목받고 있다. 이 가설에서는 중력으로 작용하는 끈(중력자)만이 유일하게 브레인의 속박을 벗어나 이쪽 브레인 세계에서 저쪽 브레인 세계로 자유롭게 건너뛸 수 있다고 이해된다. 브레인 세계들이 주기적으로 멀어지다가 다시 접근하며 충돌할 때 새로운 우주 탄생(빅뱅)을 만든다는 가설은 ‘주기적 다중우주론’으로 불린다. 또다른 가설인 ‘경관 다중우주론’은 저명한 끈이론 학자 레너드 서스킨드의 책 <우주의 풍경>에서 더욱 자세히 다뤄졌는데, 공간 팽창의 에너지로 설명되는 지금의 ‘우주상수’ 값이 유일하고 보편적인 게 아니라 우리 우주를 포함하는 더 큰 우주 공간에 나타나는 여러 경우들 중 하나의 경우로 이해된다. ‘경관’ 또는 ‘풍경’에 비유하자면, 산에 높은 골짜기와 낮은 골짜기가 존재하며 경관을 이루듯이 갖가지 우주상수를 지닌 우주들이 크고작은 우주상수를 지니며 존재할 수 있음이 수학적으로 입증된다는 것이다.
제8, 9장에서는 양자역학이 낳는 좀 더 기묘한 다중우주들이 다뤄진다. ‘양자적 다중우주’는 양자 세계에 나타나는 존재의 확률론적 성격 때문에 빚어진다. 전자의 위치는 확률로만 파악될 수 있는데, (ㄱ) 위치에 놓인 전자를 관측하는 관찰자와 연계된 우주와 (ㄴ) 위치에 놓인 전자를 관측하는 관찰자와 연계된 우주는 서로 다른 우주로 파악된다는 것이다. 아홉 가지 이론 중에서 가장 난해한 ‘홀로그래피 다중우주’는 서스킨드의 또 다른 책 <블랙홀 전쟁>에서 훨씬 더 자세히 소개된 바 있는데, 그린의 책에서도 여전히 난해한 이론으로 다뤄지고 있다. 이 가설의 바탕이 되는 정보이론은 우주 만물의 근원은 물질이 아니라 정보일 수 있다고 보는데, 그런 근원적인 정보는 우주의 경계면에 기록되며 경계면 안쪽의 공간에 나타나는 물질의 존재는 경계면의 정보가 투영돼 나타나는 홀로그래프라는 게 이 가설의 뼈대이다. 그린 교수도 지적하듯이 이는 플라톤이 얘기했던 ‘동굴의 우상’ 비유와도 비슷하다. 실체는 알 수 없으며 그 실체가 비춘 그림자 영상만을 우리가 바라보고 있을 뿐일까?
그가 책에서 다룬 아홉 가지 이론 가운데 마지막 두 가지는 이전까지 다룬 일곱 가지 가설에 견줘 훨씬 더 자유분방하다. 그 하나는 공상과학 영화에서 친숙한 주제로 다루어지는 ‘시뮬레이션 다중우주’이다. 컴퓨터 기술이 발전을 거듭해 우리가 가상 세계와 그곳에 생명체, 인간을 현실과 똑같이 만들어 내어 실감나는 가상세계를 창조할 수 있다면, 즉 우리가 ‘시뮬레이션 우주’를 창조하는 날이 온다면? 그렇다면 지금이 사실 그런 세상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은가? 바로 지금 우리가 어느 프로그래머가 짜놓은 완벽한 시뮬레이션 안에서 살며 실제처럼 느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런 놀랍고 발칙한 상상이 등골을 서늘하게 만드는 시뮬레이션 다중우주의 논리가 된다. 마지막 가설인 ‘궁극적 다중우주’는 현대 물리학의 수학법칙이 유일하지 않고 그저 우리 세상을 설명하는 법칙일 뿐이라면, 우리가 만들 수 있는 온갖 가지의 수학법칙이 물리적으로 실현되는 또 다른 우주가 존재하지 말란 법이 없다는 논리를 제시한다. “모든 가능한 수학법칙이 어디선가 물리적으로 실현되는 다중우주”(468)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 다중우주이론을 바라보는 그린의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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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은 다중우주 이론을 ‘코페르니쿠스 식 사고의 전환’이라는 물리학의 역사 전통에서 바라본다. 지구가 우주 중심이라고 믿던 근대 이전의 우주관에서 벗어나 객관적인 관점으로 지구와 인간을 바라보기 시작한 코페르니쿠스 혁명은 그 이후에도 계속되어 우주론은 태양계 중심에서 벗어나고, 우리 은하 중심에서 벗어났으며, 이제는 우리가 우주의 극히 작은 일부일 뿐이라는 인식의 지평을 넓혀왔다. 그러니 우리 우주가 유일하지 않을 가능성을 과학과 수학으로 추론하는 다중우주 이론은 이런 전통을 잇는 지적인 탐구 활동이다. 책의 원제인 ‘숨겨진 실체(The Hidden Reality)’처럼 실체는 여전히 알지 못하며, 그런 실체를 직접 검증할 수 있는 수단이나 방법은 없지만, 수학은 숨겨진 실체를 더 많이 엿볼 수 있는 길을 열어주고 있다고 그린 교수는 바라보고 있다. “중요한 것은 그동안 우리가 ‘우주’라고 생각해왔던 것이 실체의 전부인지, 아니면 더 크고, 더 희한하면서 더욱 은밀한 어떤 실체의 일부분인지를 판단하는 것이다”(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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